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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4 | 화려한 휴가
Personal | 2007/08/26 17:53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유황도)를 소재로 연달아 두개의 영화를 제작했다. 아버지의 깃발 <Flags of Our Fathers>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Letter From Iwo Jima>이다. 두 영화 모두 각각의 제목을 가진 책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아버지의 깃발은 이오지마 전투의 참혹함과 미국 정부의 허황된 전쟁 영웅 만들기를 비판하였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이오지마 전투 당시 이오지마 수비대 대장이었던 쿠리바야시 타다미치가 가족에게 보낸 41통의 편지를 바탕으로 이오지마 전투의 실상을 파했친 책이다.

이오지마 전투는 미군과 일본군과 벌인 지상전 중 유일하게 일본군의 희생자 보다 미군 희생자가 많은 전투였고, 전장 자체도 워낙 험해서 이오지마는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올정도로 험한 전장이었다고 한다. 이오지마는 도쿄에서 정남쪽으로 약 1200km 떨어진 섬으로, 크기는 여의도의 약 2.2배 정도로 가로 8km 세로 4km 정도의 화산섬이다. 휴화산이고, 물도 없고 작물도 없이 잡초만 자라는 미군은 2차 세계대전중 단일 면적에 가장 많은 포탄을 투하한 곳이라고 한다.

여의도 2.2배 정도의 작은 섬에 미군 6만명과 일본군 수비대 2만병이 혈투를 벌여 미군 25000명과 일본군 21000명이 그 섬에서 죽었고, 대부분의 시신은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이오지마는 섬이 평탄하여 비행장을 만들기 좋았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그 작은 섬에 두개의 비행장을 만들고, 이오지마 전투 직전에는 3번째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태평양에 가라안지 항공모함으로써 이오지마의 위치는 전략상 중요한 거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양군은 이 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좁은 섬에 어마어마한 병력을 투입했다. 허나, 일본군은 그 섬에 투입된 순간 바로 버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오지마의 점령은 일본 전역의 공습이 가능한 것을 의미했으나, 당시 일본군 지휘부는 전멸할 때까지 싸우라는 지시만 내리고 이오지마를 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인들은 이오지마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이오지마를 버린 자신들의 선택을 숨기려는 듯... 이오지마의 일본군 사령관 쿠리바야시 타다미치는 가족에게 보낸 유언장과 같은 편지를 비롯하여 가능한 많은 기록을 남겨 이오지마에서 숨져간 병사들과 자신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였다. 쿠리바야시 타다미치가 이오지마에서 벌인 작전은 미군에게 너무도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일본 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하다고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로 만들지 않았다면, 나도 이 전투를 그냥 지나쳐왔겠지만 이 영화 때문에 쿠리바야시의 편지를 보고 싶어져 책을 샀고, 단숨에 읽어내렸다. 우리나라에게 일본군은 좋은 감정을 일으키기 어려웠고, 이오지마에서 숨져간 한국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 출신 일본인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조선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이 우리 조상들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오지마에서 싸우다 죽어간 일본인들이 보인 행동은 단순히 광기로 표현할 수 없다. 그들도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 뿐이다. 자신들이 버려진 것을 알고서도 끝까지 싸운 그들의 용기에 감동한 사람이 정작 일본인이 아닌 미국인들이었다는 것에 묘한 기분마져 든다.

사실 영화 자체가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 하려다 보니, 이오지마 전투에 대해 어느정도 알지 않는다면, 의미없는, 단지 힘든 곳이라는 생각만 들지도 모른다. 이오지마는 물도 없고, 전투 당시 제대로 된 건물은 단 한채도 존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동굴과 동굴을 파서 진지로 연결하고 천막과 동굴 속에서만 생활하였다고 한다. 물은 빗물을 받아서 생활했다. 씻을 물은 당연히 없었다. 그런 험한 상황에서 무려 36일 버티며 미군을 괴롭혔다. 탄환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싸우고, 탄환이 떨어지면, 수류탄, 대전차 지뢰를 몸에 달고 적진에 뛰어 들었고, 그거 조차 없으면 대검만으로 싸우러 달려들었다. 광기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Photography | 2007/08/19 22:21
삼성-LG의 올해 마지막 잠실 3연전이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다니.. 햇볓은 뜨거웠지만 구름사이로 간간히 들어나 견딜만 했다. 해가 지면서 경기는 점점 뜨거워져 갔다. 바람도 선선해지고, 노을도 멋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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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야구장



경기 초반 먼저 삼성이 1점을 내면서 나아갔다. 곧이어 LG가 홈런 한방을 포함 내리 3점을 뽑아내며 역전.. 잠시 소강상태 후 5회 삼성이 다시 2점을 내면서 다시 3:3 동점.

이후 6회 무려 5점을 뽑아내며 8:3으로 앞서나가 이번 경기도 순조롭게 이기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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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야구는 경기가 끝나야 안다고, LG의 공격이 계속 무위로 끝나는 듯 하더니 7회 2사후 LG의 타선이 미쳤다. 정확하게는 권혁, 권오준 쌍권총이 말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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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9:8로 역전 LG는 삼성전 4연패를 끊는 기쁜날이었다. 에휴!! 오랜만에 경기장 가서 기분은 좋았으나, 피곤하기도 하기도 하고, 하도 어이 없이져서. 안타깝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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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 2007/08/10 18:46
새로 나올 고액권 도안에 사용한 인물 10인이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봤다. 김구, 장영실, 장보고, 한용운 심지어 주시경까지 나름 참신한 인물들이 등장한 것 같다. 김정호, 정약용, 장영실등 기술 사회를 반영하는 인물이 대거 등장한 것이 더 좋았다. 장영실이란 이름을 보다 보니 갑자기 장영실의 생애가 궁금해졌다.

그가 노비 출신으로 손재주 하나로 성공했으나, 그가 죽은 날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갑자기 왜 기록에 남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알아본 그의 최후는 순탄치 않았다. 기록은 다음과 같다.

1442년 대호군(大護軍) 장영실은 그 해에 세종 임금이 탈 가마인 안여(安輿)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묘로 행차하던 도중 교군 (가마 메는 사람) 한 사람이 넘어지면서 가마가 부서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장영실은 직첩을 회수당하고 곤장을 맞았다. 이후 1450년경에 세상을 떠난것으로 추측된다.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이지만, 기구를 잘 못 만들어 임금의 몸을 상하게 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나보다. 그 죄로 그 간의 공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죄인으로 살게된 그의 인생이 참 기구하다. 조선에서 왜 기술이 더 나올 수 없었는지 이해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의 최후를 보니 새로운 화폐도안에는 장영실을 넣고 싶어진다. 만인을 편하게 하는 기구들을 수 없이 만들었으나, 1인을 위한 가마를 그것도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해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떠날 수 밖에 없던 그의 삶에서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알려주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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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 2007/08/04 23:11
무겁고, 또 무거운 주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더 큰 문제는 가해자들이 더 떳떳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를 무겁게 하고, 그 불편한 진실이 이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하는게 아닌가 싶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분명 상업영화이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연일 근래 최다 관객 동원에 대한 기사를 내놓으면서 이 영화가 상업영화라는 사실을 분명히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아쉬운 점은 권력실세에 대한 이야기에 대하여 어쩌면 TV 드라마 보다 더 적게 다루지 않았는가 싶다.

영화를 보면 군인들이 나쁜놈이고 시민들은 착한 놈이라는 것인데, 뭐 영화에서는 단순한 이분법이 좋겠지만 적어도 이런 소재에 대해서는 좀 더 다른 접근을 했으면 했는데 많이 아쉽다.

불과 27년전의 이야기 이지만, 아직도 광주 사태가 청산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오늘도 다시 광주를 가지고 검색을 해보니 여전히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파 공작원이 주동한 폭동사건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사이트가 광주민주화운동 사이트보다 먼저 뜨는게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6.25가 1950년에 발발했는지도, 우리나라가 언제 광복을 하고, 건국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방팔방 널린 마당에 광주의 진실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더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고 있으니...
Personal | 2007/08/03 12:52
아침에 "대학도 백화점·찻집·영화관 할 수 있다"란 제목의 기사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정부의 대학 운영 정책에 대한 방향이 이제는 완전히 굳어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민정부 이래 가속화 된 교육의 상업화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것 같아 보인다.

대학 자율화 조치 이후 등록금은 연평균 10%이상 가파르게 올라왔으며, 학생들이 낸 등록금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는채 인상되고, 대학 재단들은 그 돈으로 각종 건물과 기자재들을 사들이며 자신들의 재산을 불려왔다. 대한민국에서 이 보다 편하게 장사하는 곳이 또 있을까?

과거에는 학교앞 밥집, 찻집, 영화관이 학기중에는 한 몫 챙겨왔지만, 대학당국은 그마져도 배가 아펐던 모양이다. 도대체 학생들의 주머니에서 얼마나 삥을 뜯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서울의 모 대학안에 스타벅스에 교보문고 까지 들어간다더니, 외주 회사에 주기 아까웠는가? 책한권 읽지 않은 대학생들이 전체 학생의 절반을 넘어가는 이 상황에 학교 수업을 따라 가지 못해 과외를 받는 대학생이 출현하는 이 사태에 근본적인 문제 해결 보다는 자신들의 학교 수준을 입학생의 수준으로 맞추려는 대학당국의 시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교육부가 어찌 그리 쉽게 이런 것에 대해서는 허가할 수 있는지?

이 법안을 입안한 정책 당국자가 누군지 정말 궁금하다. 대학과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교육이란 이름 아래 이뤄지는 도둑질이 아닌지 다시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분명 잘 못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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